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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언제까지고 길바닥에서 춤을 출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고시원에 사는 궁상맞은 형편에 스튜디오를 빌릴 수도 없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선택은 춤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저… 학번이? 신입생 맞으세요?”
그런데 이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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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한 줌 없는 지하 공간.
중앙의 형광등만이 애처롭게 공간을 밝히려 애쓴다.
낡은 테이블 건너의 두 남녀는 빛을 등지고 앉아 있다.
역광에 노출된 그들의 아우라가 마치….
나 지금 취조 받고 있는 건가?
뿔테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군 복학 후 2학년이신 거네요?”
“…네.”
뿔테녀가 고개를 돌려 멀대남에게 말했다.
“근데 신입생 말고도 동아리 가입 가능?”
“몰라.”
“나도 모르는데….”
뿔테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난처한 표정이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뭐지? 저 공손한 자세는?
“선배님! 저희가 1학년이라 잘 모르거든요. 나중에 동아리 회장님 계실 때, 다시 오시는 게…?”
이것들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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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회장님이 계실 때 다시 오지 않았다.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가는 걸 본 멀대가 재빠르게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마침 근처에 있던 회장이 동아리방으로 급히 왔다.
회장이란 사람은 그러니까….
산적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산적이 나타나다니, 거기 니들 멀뚱이 구경만 하지 말고 신고 좀!
회장은 나보다 학번도 나이도 하나 많은 3학년 선배였으며 자신의 이름을 나웅 이라고 밝혔다.
첫인상은… 어마어마한 알통을 지닌 산적? 그것도 그냥 산적이 아니라 두목!
“신입생이 아니라도 가입은 가능해. 우리가 총동연도 아니고 사실 그런 건 회장 맘이거든. 근데 왜 가입하려는거야?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렇잖아. 보통 군대 다녀오면 있던 동아리도 탈퇴하는데.”
생긴 것과 다르게 목소리는 부드럽고 말투는 차분하다. 그건 그렇고,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아이돌 하다 교통사고로 불구가 됐고 네임드PD가 되었지만 가슴 속 한켠에 이루지 못할 꿈인 춤을 파묻고 있었는데, 운좋게 차원이동을 해서 춤출려고 가입하는건데요.
…라고 하는 건 너무 솔직한가? 그래, 초면에 너무 솔직한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살짝 둘러대야겠다.
“댄스커버를 해보고 싶어서요. 제가 아이돌을 좋아해서….”
회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납득한 표정이다. 안 먹히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이게 먹히네.
“음, 그래? 그럴 수 있지. 아이돌 누구 좋아하는데?”
“…”
젠장! 나 이 세계 아이돌 아직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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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왜… 갑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그… 있잖아요. 걔네들…”
회장의 표정이 뜹뜨레해진다.
무슨 이런 놈이 있냐 하는 표정이다.
그래, 인정.
이건 내 실수다. 아이돌 이름 정도는 공부했어야 했는데.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공부할 게 너무 많았다.
차원 이동하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신체를 맞이해봐라.
적응하고 공부할 게 산더미다.
“흠….”
미심쩍음이 한껏 담긴 회장의 ‘흠’ 뒤로 앳된 여자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뿔테녀다.
“아이돌을 좋아해서 댄스 커버까지 하겠다는 사람이 좋아하는 그룹 이름을 몰라요?”
넌 왜 끼어드는 건데!
아까부터 참 마음에 안 드네.
에라, 모르겠다.
분명 5인조 걸그룹은 있을 거고.
그중에 비담은 이쁘겠지.
이 정돈 전 차원 공통이 아닐까?
내가 말했다.
“그… 왜 있잖아요… 5명인데… 엄청 예쁜 애 있는 그룹.”
이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동아리방 어느 구석에서 우리 말을 듣고 있던 멀대가 말했다.
“비아키스! 비아키스 좋아하세요? 저도 엄청 좋아하는데!”
그래, 이 자식! 왠지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더라니. 얼굴이 덕질 꽤나 해 봤을 법한 상이더라.
믿고 있었다구!
“비! 비아키스 좋아합니다! 제가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어서. 하.하. 갑자기 안 떠올랐었네요.”
그제야 산적, 아니, 회장이 납득한 표정이다.
“아, 비아키스 좋아했구나. 나도 걔들 좋아해. 특히, 유미! 걔가 아주!”
회장의 두 손이 가슴 언저리, 허공에 있는 가상의 무언가를 떠받친다.
그의 시선은 45도 위의 그 어딘가로 향했고 표정은 므흣, 아니, 흐뭇하다.
동아리방 구석에 앉아 있던 멀대의 시선도 45도 위의 어딘가로 향했고, 그의 표정 역시 흐뭇하다.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나도 45도 위의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그녀를 상상하며 므흣, 아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아키스의 유미라고 했던가? 누군지 모르지만, 오늘부터 팬할게.
고마워!
“변. 태. 들.”
뿔테녀의 무심한 듯 차가운 그 말에 여신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던 공기가 급격히 식어버렸다.
“흠.”
“음.”
“…”
끈적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춤신춤…에 가입한 걸 환영해.”
뭐지?
회장님, 대체 왜 뒷말을 흐리는 겁니까? 당신도 차마 뱉지 못하는 동아리명이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