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온 곳은 대학가 1층에 위치한 ‘프렌즈’란 이름의 호프집이다. 알록달록한 네온 불빛이 군데군데 빛나고 실내조명의 광도가 낮아 어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학가에 산재한 평범한 술집이다.
“안녕, 난 임창민이고 여기 부회장. 앞으로 잘해보자.”
테이블 너머의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 잡으며 본 그의 얼굴엔 CF에서나 나올법 한 깔끔히 정제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 잘 부탁 드려요.”
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신입이 들어왔을 때 국룰인 자기소개 시간이 지나가고 본격적인 술자리가 이어졌다. 4인 테이블 2개를 붙인 8인 테이블, 내 자린 신입이라는 이유로 정중앙이다.
와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술잔이 오가고 골뱅이 무침의 빨간 국물과 땅콩껍질이 테이블을 어지럽힌다.
서울대생이라고 해서 별 거 없구나. 하는 얘기들이 뻔 한 얘기들 뿐이다. 남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형법 이야기, 민법 이야기,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야기.
술자리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야기는 기본 아닌가. 국민 안주 같은 거지. 큼.
내 오른쪽 테이블에는 나랑 같은 2학년인 이지애와 김효린이 나란히 앉아 있다. 자기들 딴에는 조용히 속닥거린다고 하는데 내 귀가 워낙 밝아야지 원.
“상미 선배는 인기 폭발이네. 창민 오빠에 이어서 저 선배까지.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나도 하얗고 싶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안 돌려도 안다. 쟤는 김효린, 갈색피부에… 탄력적인 몸매가 돋보이던… 크흠.
“까망아, 넌 포기하세요. 타고난 DNA는 바꿀 수가 없다구.”
얘는 이지애, 이 술자리의 주종을 소주에서 맥주로 바꾼 얘. 본명인 지애보단 재재라는 별명으로 대부분 불리는 것 같다. 재재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지애라는 발음을 빨리 해보라고 했다. 지애를 빨리 부르면 재가 되고, 재보단 재재가 더 재밌단 이유로 재재로 불리는 거란다. 그런데 얘는 뭔가를 닮은 것 같은데… 그 뭔가가 뭘까, 아, 안 떠오르네.
“선배님, 혹시 강간 했어요?”
!!!
아! 아니! 아니! 아니!
경찰 선생님 전 아닙니다! 전 아니라구요!
이런 미친!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가는게 느껴진다.
옆에 앉은 재재도 그게 느껴졌는지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런데 내 표정이 왜 썩어가는 지 그 이유는 모르는 것 같다.
“선배님, 그럼 아직 음란물도 안 보셨겠네요?”
아니, 그건…
차원 이동을 하기도 했고… 또 요즘 나름대로 심적,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아니! 아니지! 이게 아니야!!!
난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받아칠 준비를 했다. 하,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서두를 던질지 감도 안 잡히네.
그런데 재재 요넘이 협곡에서 좀 놀았는 지 타겟팅을 바꾸는 솜씨가 예술이다. 살기를 감지한 건가? 내가 화를 낼려는 찰나에 재재의 질문이 임창민에게 쏟아졌다.
“창민 오빠, 강간 파트가 원래 이렇게 어려워요? 헷갈리는 케이스가 너무 많더라구요. 강간할 때, 강간 피하려고 도망가다 높은데서 떨어져 죽을 뻔 하면 그게 강간미수에요? 살인 미수에요?”
임창민이 말했다.
“재재 형법 시험 있구나.”
“네에. 시험 범위도 너무 넓고, 헷갈리는 케이스도 많고 죽겠어요.”
아.
아아.
아아악!
그렇군. 그런거였군.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