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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의 서편 외곽엔 작은 쪽문이 있다. 쪽문을 나가면 원룸촌이 존재하고 그보다 훨씬 더 나가면 낡고 오래된 고시원이 있다.
쪽문 인근 원룸촌에 서식하는 두 여학생은 먼동이 틀 무렵, 쪽문 안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저 사람 또 저러고 있네.”
“어디? 어디? 전에 그 돼지 또 그러고 있어? 아! 저깄다.”
그녀들이 바라보는 곳은 길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공터였다. 그곳엔 파란 인영이 춤을 추고 있었다.
“와, 대박! 오늘은 파란 돼지네. 저, 저 땀 좀 봐. 으, 드러!”
“야아, 넌 말을 꼭!”
“뭐가?”
“혹시 귀 밝은 돼지면 어쩌려고, 저 덩치로 우리한테 달려온다고 생각해봐. 으, 치 떨려. 구경 다 했으면 이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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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데 돈이 빠질 수 없듯이 청춘에게는 외모가 빠질 순 없는 노릇이다.
귀밝은 파란 돼지도 잘 알고 있다.
이 마귀할멈들아!
솔직히 조금은 쪽팔린다.
그런데!
나라고 사람들 지나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여기서 춤추고 싶겠냐고? 여기 말곤 마땅한 데가 없으니, 여기서 이러는 거지!
그토록 갈망하던 춤을!
드디어!
출 수 있게 됐는데 그깟 쪽팔림쯤이야.
어! 어! 쟤들은 새내기 같은데!
…예쁘고 풋풋해.
내 발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무 뒤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무거운 몸으로 한참을 뛰어다녔더니, 힘들다.
결코! 쪽팔려서가 아니라고.
그건 그렇고 살을 뺀다고 노력은 하는데 좀처럼 쉽지가 않다.
어릴 때부터 꾸준하게 살 찌는 음식들만 골라 먹은 몸이라, 체질부터 개선을 해야 한다.
맨날 책상에 앉아 책만 파던 몸이다. 거기다 스트레스를 정크푸드로 풀었으니, 어디 쉽사리 빠질 살이겠는가.
그나마 위안이라면 키는 그래도 큰 편이라는 것. 운동이나 야외활동은 극도로 기피했기에 흑돼지가 아니라 뽀얀 백돼지라는 것.
살 빠지면 그래도 좀 봐줄 만 하지 않을까?
사실… 외모는 청춘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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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고 한동안은 적응기를 가졌었다. 이전 주인의 루틴대로 살아도 보고, 이 세상은 어떤가 둘러도 보고.
저세상 PD가 이 세상에선 검사! 라는 드라마도 머릿속으로 찍어봤다.
이왕 법대생 몸으로 빙의한 거, 이참에 공부 열심히 해서 검사나 돼볼까 싶었지만.
한자가 절반인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저게 한국말인지 때국말인지 분간도 못 하는 수업을 듣고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직 못다 한 적응이야 살면서 체득하면 되는 거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때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가시나가 돌았나?”
“머라카노! 찐따 새끼가! 미칫나?”
난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문에 쓰인 글자를 다시 보았다.
‘舞神舞王’
하….
그나마 아는 한자라 다행이긴 한데.
법대 단과 동아리 아니랄까 봐, 이걸 한자로 쓴다고?
춤신춤왕이라…
혹시 한글로 쓰기 부끄러워서 한자로 쓴 건가?
뭔가, 합리적 의심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등어리가 서늘하다.
태초부터 진화해온 위험 감지 DNA가 경고를 하는 듯 하다.
!warning !warning !진입금지 !진입금지
다른 시공간에서 누군가 스테이! 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누구 들은 사람? 없구나….
난 다시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좀 전에 봤던 아담한 뿔테녀와 멀대남이 여전히 으르렁대고 있다.
“니가 뭔데 우리 진우 오빠 욕하는데! 그지 같은게.”
“야! 걔 고삐리야. 양심 출타했냐? 지는 5분 먼저 태어났다고 누나라고 부르라면서! 뭐? 진우 오오빠아아!? 니가 걔보다 더 처먹은 밥그릇 개수가 몇 갠데 오빠는 무슨.”
“하, 이 어린노무쌔리가 진짜!!! 뒤질래? 척추 반으로 접어줘?”
저기요.
싸우시는 와중에 죄송한데 여기 사람 있습니다.
난 존재의 증명을 위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두 남녀가 날 바라본다.
작은 키에 뿔테 안경을 쓴, 뽀얀 얼굴의 여자애가 먼저 내게 말을 건넨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어라, 원래 계획은 통성명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감도를 올린 뒤 여기 온 목적을 말하려고 했는데.
저 여자가 내 계획을 단 한마디로 파훼해 버렸다.
저 여자가 고수인가 내가 멍청한 건가.
어쨌든 ‘무슨 일’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동아리 가입하려고요.”
내가 명확히 목적을 밝혔음에도 멀대남은 못 알아들은 듯 했다.
“…네?”
다시 한번 정확한 발음으로.
“동아리 가입하려고요.”
이번엔 뿔테녀가 못 알아들은 듯 하다.
“네!?”
요 어린노무쌔리들이 벌써 가는 귀가 먹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