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이 천재인가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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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태구는 후배 둘을 기숙사로 바래다주고 자신이 사는 고시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살짝 몽롱한 취기에 새벽녘 그 특유의 색채와 냄새가 마음을 뭉글하게 했다.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던 길태구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손목에 채워진 나무 팔찌를 지긋이 응시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팔찌.

팔찌의 중앙에는 알 수 없는 문형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 피디님! 이거 오다가 주웠는데… 선물이에요.

그 아이가 살아 있을 적엔 한 번도 팔찌를 찬 적이 없었다.

그 아이가 죽고 나서는 한 번도 팔찌를 벗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때, 팔찌가 말했다.

“소원을 말해봐.”

그가 말했다.

“다시 걷고 싶어. 다시 달리고 싶어. 다시 춤추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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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사방이 꽉 막힌 누런 벽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시 3분이다.

고시원 옆 방에 사는 저 인간 때문에 알람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도 아니고!

아침마다 꼭 저렇게 쾅 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건지.

어제 아침엔 참다 참다 못 참아, 한소릴 하려고 쾅 소리가 나자마자 인상을 쓰며 나갔는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동네 깡패들은 부지런한 모양이다.

저렇게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깡패라니.

팔에 휘황한 문신을 한 깍두기 덩치를 보니 끓어오르던 분노가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내가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강제로 분노를 조절해주는 좋은 이웃이었던 것이다.

하아…. 이 놈의 고시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에서 살다 삶의 질이 최악인 고시원에 살려니….

좋다. 날아갈 듯이 좋다.

다시 걸을 수 있는데 고시원이 문제일까? 길바닥에서 살래도 살 수 있다.

기분 좋아야 하는 쾅 소리로 깬 나는 공용 샤워실로 향했다.

타일 사이로 예쁘게 증식한 코발트색의 곰팡이를 보며 어르신의 오줌발처럼 가늘고 뚝뚝 끊기는 샤워기로 산뜻이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빨간 체크, 파란 체크, 노란 체크.

체크 체크한 셔츠들이 작디작은 옷장에 걸려있고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의 단색 반팔티들이 곱게 접혀있다. 오늘은 뭘 입을지 잠시 숙연해… 아니, 고민해본다.

그래, 까짓거 갈 데까지 가보자.

파란색 티셔츠와 똥 싼 청바지의 깔맞춤!

그래, 난 기쁘다.

죽다 살아나… 아니지, 죽다 교통사고로 죽은 청년의 몸에서 깨어나….

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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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學論集>

<刑法要論>

좁은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뭐라고 읽는지도 몰랐던 무식하게 두꺼운 서적들. 검색해 보니 법학 서적들이었다.

이전 세계에선 로스쿨의 등장과 함께 서울대 법대는 사라진 걸로 아는데 이쪽 세상은 여전히 서울대 법대가 존재한다.

이전 세계에선 PD 박명우가 존재했는데 이쪽 세상은 존재치 않는다.

대체로 비슷하지만 군데군데 핀트가 엇나간 세상이다.

몸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전 기억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산화된 사진처럼 흐릿한 잔재들은 남아있다.

이 몸의 원주인은 그러니까….

아침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지극히 평범한 아침 드라마 배경에.

무너진 집안을 다시 세우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하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장남이라는 흔한 케릭터.

식상하지 않은가? 여기에 재벌과 기억상실이 나오면 완벽한 아침 드라마가 될 테다.

뭐, 잘 찾아보면 주위에 꽤 있는 인물상이다.

소속사 아이돌 중에서도 저런 얘들이 꽤 있었다.

성공과 가족에 집착하는.

자신의 행복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에 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식상하고 답답한데 불쌍하고 안타깝다.

흐릿한 사진첩을 하나하나 넘겨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웃음을 잃어버린 메마른 기억뿐이다.

참 미련한 친구다.

오로지 공부! 공부! 공부!

학원 한 번 안 가고 과외 한 번 안 받고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으니, 그 노력이 얼마나 컷겠는가.

죽어라 책만 파다 골로 간 불쌍한 영혼이다.

난 두 눈을 감았다.

차원이동도 하는 판에 환생이 없으리란 법도 없고 내새가 없으리란 법도 없다.

‘고된 생을 참 열심히도 사셨습니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웃음을 잃지 않는 삶을 사시길,

부디 행복하시길.

흙으로 돌아갈뻔한 이 육체는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가족들은 걱정 마세요. 잘 보살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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