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이 말했다.
“사실은 말야….”
이때는 몰랐다.
이 기수식에 이은 연환콤보가 얼마나 지옥같은지.
실로 비기라 할만 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비기를 이렇게 부르겠지.
<비기 : 귓구녕에서피날때까지!>
반격할 틈이 없는 연쇄적이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가히 공포 그 자체라 할 만 했다.
“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어! 저기! 저기! 아이유!”
“불이야!”
– 같은 회피기조차 통하지 않을 줄이야.
사실 아이유는 안 통하는게 당연하다. 급하니까 튀어나오긴 했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다른 차원의 인물까지 외쳤겠는가!
저 덩치에 집요함까지 갖추다니….
무서운 사람이다.
회장의 기이이나아아긴 로오오옹 토크가 끝이 났을 때, 내 대답은, “생각해볼게요.” 였다.
연환콤보를 끝내기 위해 “네! 네! 제가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쇼.” 라고 할 뻔하긴 했지만! 내가 누군가!
가, 간신히 겨우 버텨내고 대답을 미뤄두었다. 뭐든 약속은 깊게 생각해야 한다.
약속의 무게는 때론 깃털처럼 가벼워 어깨 위에 앉은 것 조차 모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인간의 인생을 뒤 엎을 만큼 지독할 때도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듯이 겪어 봐야 알게 되는 교훈이다. 두번 세번 생각해도 모자르지 않다.
고시원으로 돌아와 깨끗한 물로 귀를 씼어낸 후, 회장이 한 말들을 돌이켜 봤다. 많은 등장 인물이 있었고 많은 입장이 있었다. 그것들이 모여 많은 갈등이 생겨났다.
이것 저것 잡다한 이야기를 걷어내고 큰 줄기만 말하자면.
몇 년 전까진, 춤신춤왕도 댄스 동아리로써 버스킹도 하고 축제같은 학교행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이 1학년이던 그해, 가을 축제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문과대 댄동 피버와의 합동공연을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3학년들은 고시 준비다, 취업 준비다 해서 연습에 참석조차 드물었고, 주축이 되야할 2학년들은 회장말론 놈팽이만 한가득이던 기수였다고 한다.
축제 무대라는게 그렇다. 아무리 못하고 실수하고 해도 왠만하면 박수를 쳐준다. 말 그대로 축제, 즐기는 자리 아닌가.
그런데 대체 무대 위에서 무슨 짓을 어떻게 했길레, 그토록 자비로운 무대에서 야유를 받으며 내려온단 말인가.
그 뒤로 춤신춤왕은 아이스에이지에 돌입을 한다. 차츰차츰 연습도 줄고, 버스킹이나 행사도 줄어들다 결국엔.
무늬만 댄동이지 춤추지 않는 동아리로까지 변하게 된다.
회장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동아리를 유명무실하게 둘 순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늘어놓을 때의 그 결연한 눈빛은 한 마리의 팬더, 아, 아니, 한 마리의 야수를 보는 듯 했다.
뭐, 결론은 나보고 이번 축제때 공연 연습을 진두지휘해달라는 건데.
내가 이걸 해야 하는가?
뭐, 혹하는 부분이 있긴 했다.
300만원의 상금!
축제 공연팀 중 1등을 차지하면 받게 되는 300만원의 상금!
그걸 다 준다는 건 아니고.
그 중 3분의 1인 백만원을 딱 잘라 내게 준다고 한다.
쓰으읍.
아, 군침이. 지금 내 형편에 백만원이면 달달하긴 할 테다.
사실, 돈이 좀 필요하긴 하다. 수업도 안 들어가는 나일롱 학생이지만 어쨌든 이 생활을 올해까진 이어갈 계획이다. 이전 삶에선 고등학교 중퇴의 최종학력이었는데 이세계에선 서울대생이라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서울대 캠퍼스를 누벼보겠는가! 능력만 된다면 졸업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란 걸 내 자신이 잘 안다. 그게 내가 꿈꾸던 생활이 아니기도 하고.
서울대생 생활도 내년이면 빠빠이고 작곡에 필요한 장비라도 있어야 돈 걱정없이 내가 살고 싶던 삶을 살 수 있을테다. 거기다 길태구의 가족들을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역시나 사람 사는데 돈은 빠질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음…. 뭐, 꼭 돈 때문만은 아니고….
회장이 애걸복걸하기도 하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해볼까 싶다.
다음날 오전 일찍,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양반 추진력이 탄도미사일급이다. 그래도 쇼부는 봐야겠지.
난 150만원을 불렀고 회장은 난색을 표했다. 이거 쉽지 않겠는 걸.
“…아니, 그게 아니라….”
“…니 말도 맞긴 한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저렇게 해서…,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요.…”
“…요렇게 하는 걸 어떨까?…”
하아, 혓바닥에 땀이 난다.
어쨌든, 기나긴 마라톤 협상의 결과로 127만원이라는 금액에 합의를 했다.
꼭 돈 때문에 하려던 건 아닌데….
쓰으읍, 아, 왜 자꾸 군침이.